월간 헤이리뷰는 "헤이리의 리뷰"라는 뜻으로 매달 헤이리예술마을의 행사나 공간 등을 1~2곳씩 여행작가의 리뷰로 소개해드리는 코너입니다.

[11호] 진화한다 (2022.11.)

헤이리예술마을
2022-11-26

11호(2022년 11월) : 문준용 미디어아트 전시회 | 북하우스


"월간 헤이리뷰는 매달 1~2곳의 헤이리 콘텐츠를 리뷰로 소개하는 웹진입니다. 여행작가의 취재 및 원고로 제작되므로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


글,사진 : 유상현 (헤이리에 사는 여행작가. <프렌즈 독일> <지금 비엔나> <루터의 길> 등 8권의 유럽여행 서적을 쓰고, <오늘 같은 날 헤이리>를 공저하였다.)




진화한다

작은 마을을 온통 책으로 뒤덮은 모습, 평범한 일상이 곧 도서관이 되는 모습,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 출판인들이 영국의 어느 소도시에 매료되어 한국판 ‘책의 마을’을 꿈꾸었다.

꿈을 꾼 출판인은 ‘책의 집’을 만들었고, 지금 ‘책의 집’은 진화하고 있다.


10년 전 헤이리마을에 갓 입주했을 때 내 집엔 아무것도 없었다. 해가 지면 컴컴해지고 주변에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자동차가 없는 필자에게는 난감한 시련이었다. 집에 인터넷을 연결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번은 급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PC방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컴컴한 마을을 배회하며 핫스폿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다행히 어느 인심 좋은 큰 건물의 핫스폿이 개방되어 있었다. 건물 앞에 바짝 붙어 추위에 벌벌 떨며 꽁꽁 언 손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그 날 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건물이 헤이리마을에서 상당히 유명한 건물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쩐지,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생긴 것도 특이했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도 예사롭지 않았더랬다. 북하우스. 30년째 인문학 서적을 파고 있는 한길사에서 만들었다. 한길사 대표 김언호씨는 헤이리마을이라는 무모한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며 기어이 현실에 펼쳐놓은 주인공이자 헤이리 초대 이사장이기도 하다. 김언호 등 여러 출판인이 출판산업단지(파주출판도시)를 만들고자 세계 곳곳을 누비던 중 발견한 영국의 소도시 헤이온와이(Hay-on-Wye)에서 힌트를 얻어 한국에서 ‘책마을’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고, 그 비전이 좀 더 확장되어 ‘책과 예술의 마을(서화촌)’로서 헤이리예술마을의 탄생을 이끌었는데, 북하우스는 말하자면 ‘책마을’의 꿈을 집대성하여 헤이리마을에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김언호의 의지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높은 층고를 빼곡하게 채운 책이 온 벽에 가득하다.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채운 것을 보니 이 책들은 자유롭게 열람하는 독서용 서적이 아니라 이 공간의 ‘안주인’이 분명하다. 방문객은 안주인이 바라보는 곳에서 식사나 음료를 곁들여 쉬어간다. 또는 좁은 경사를 따라 2층, 3층, 차례로 오르는 가운데 양쪽에 도열한 책을 구경하거나 구매해도 좋겠다. 온통 책이로구나, 그래서 북하우스로구나!


헤이리예술마을에 영감을 준 영국의 헤이온와이처럼, 북하우스는 책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융합을 이룬다. 지금이야 이런 콘셉트의 도서관 또는 북카페가 곳곳에 있지만 당시 북하우스는 ‘전국구급’ 이슈를 생산하는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북하우스를 설계한 건축가 김준성은 헤이리마을의 건축설계지침(마스터플랜)을 만들기도 했다. 즉, 헤이리마을의 탄생 목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축주와, 헤이리마을의 건축 철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축가로부터 탄생한 역작이라 하겠다.

 

한때 한길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식당 또는 북카페가 자리 잡았던 1층은 이제 나인블럭 카페로 바뀌었고(프랜차이즈가 금지된 헤이리마을에서 우여곡절 끝에 공식적으로 허용한 첫 프랜차이즈이다), 쉬지 않고 전시나 공연이 이어지던 지하 공간 ‘한길 아트스페이스’에 불이 꺼지는 날이 많아졌으며, 탁 트인 마을 전경을 자랑하던 루프톱은 그 앞에 새로 지어진 건물에 막혀 더 이상의 전망이 허락되지 않아 출입이 통제되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북하우스도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이 책을 더 멀리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탐구하며 넓은 공간을 채워나가는 북하우스의 고집이 시든 것은 아니다. 서점과 카페와 전시장이 경계를 두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며, 사실상 층수를 구분하는 게 의미 없는 독특한 구조의 건물에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도, 책에 관심 없는 사람도, 모두가 문화예술의 향기에 취할 수 있는 건 분명하다.

 

팬데믹의 끝이 보이는 지금, 다행히 북하우스도 다시 기지개를 켠다. 2022 헤이리 판 아트 페스티벌 기간에 맞춰 아트스페이스에서 김언호 사진전 <책들의 숲이여 음향이여>를 열어 김언호의 서적 <세계서점기행>(한길사, 2020)에 실린 사진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김언호 사진전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또 하나의 전시는 오랜 세월 북하우스가 보증했던 ‘전국구급’ 이슈를 생산하였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문준용 작가의 <별을 쫓는 그림자들> 전시가 열린 것이다. 첨단 기술이 접목되어 관객과 작품이 상호 소통하며 스토리텔링을 이끄는 인터랙티브 전시는 매우 신선하고 흥미롭다. 문준용 작가가 뉴스 사회면이 아닌 문화면에 등장해야 마땅한 재능꾼임을 두 눈으로 보게 되는 자리라고나 할까. 여담이지만, 두 눈으로 관람하는 것보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서 액정을 통해 관람하면 입체감이 몇 배로 풍성해지는 마법 같은 경험도 가능하다는 사실. <빛을 쫓는 그림자들> 전시는 11월 27일까지 진행한다.

 

문득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난 뒤 책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책의 집’에서 열린 미디어아트 전시를 생생하게 관람하기 위해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어야 한다. 북하우스는 책과 상극일 것 같은 스마트폰을 품어 동시대의 문화 트렌드를 포용한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책의 집’에서 가장 디지털적인 전시를 열었다.

 

북하우스 관계자로부터 문준용 작가 전시 후에도 미디어아트 등 디지털 콘텐츠에 계속 관심을 둘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책 너머로 북하우스는 계속 진화한다. 그만큼 헤이리예술마을도 진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