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헤이리뷰는 "헤이리의 리뷰"라는 뜻으로 매달 헤이리예술마을의 행사나 공간 등을 1~2곳씩 여행작가의 리뷰로 소개해드리는 코너입니다.

[16호] 시인의 숨결, 찻집의 본질 (2023.04.)

헤이리예술마을
2023-04-28

16호(2023년 4월) : 천상병 시인을 알리는 문학카페 | 카페 귀천


"월간 헤이리뷰는 매달 1~2곳의 헤이리 콘텐츠를 리뷰로 소개하는 웹진입니다. 여행작가의 취재 및 원고로 제작되므로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


글,사진 : 유상현 (헤이리에 사는 여행작가. <프렌즈 독일> <지금 비엔나> <루터의 길> 등 8권의 유럽여행 서적을 쓰고, <오늘 같은 날 헤이리>를 공저하였다.)


시인의 숨결, 찻집의 본질

천상병 시인과 <귀천>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천상병 시인의 미망인이 서울 인사동에서 찻집을 운영했다는 사실도 대체로 많은 사람이 안다.

그런데 파주 헤이리에도 천상병 시인의 흔적이 존재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몇 해 전까지 거기에는 내 단골 카페가 있었다. 육아로 찌든 몸에 카페인을 수혈하고자 유모차를 끌고 걸어갈 수 있는 집 근처 카페 중 맛이 진하고 가격은 저렴하면서, 죄송한 표현이지만 손님이 적어 조용히 아이 낮잠 재울 수 있는 곳이어서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며 ‘라떼파파’라 불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생존을 위해 들르는 아지트였다. 하지만 손님이 적은 카페의 숙명이랄까, 그 단골 카페는 문을 닫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 자리에 ‘귀천’이라는 간판이 붙었다.


흘려 적은 두 글자 ‘귀천’.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열이면 열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여기가 천상병 시인과 관계있는 곳인가?” 또는 “인사동 귀천 찻집의 분점인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쪽 벽에 큼지막한 레터링으로 적어놓았다. “카페 귀천은 천상병 시인을 널리 알리고,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아마 열이면 아홉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과 무슨 관계인데?” 또는 “인사동 귀천 찻집과 무슨 관계인데?”


카페 귀천은 그 이상의 답을 애써 말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게 해준다. 곳곳에 자리 잡은 고가구에는 “천상병 시인의 유품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낡은 책이 가득 꽂힌 서가에는 “천상병 시인의 서재에 있던 책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카페와 연결된 작은 공간에는 천상병 시인의 작품집이나 훈장, 신문기사 스크랩 등이 빼곡한 문학관이 만들어져 있다. 이 모습을 보면 열이면 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시인과 꽤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겠구나.”


박물관에 소장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역사적인 위인의 유품을 갖춘 카페 귀천. 사연은 이러하다. 천상병 시인의 작품 저작권을 위탁받은 에이전시에서 천상병 문학관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회사가 위치한 파주 헤이리에 직접 문학카페를 열었다. 에이전시가 위탁받은 고인의 유품을 비치하고, 고인의 시집 <새>를 복간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새>는 그 유명한 <귀천>이 수록된 시인의 유고시집이며, 작가 생전에 유고시집이 출간된 매우 드문 사례인 저서이다. 그래서일까, 카페 로고에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머그컵에는 파랑새가 그려져 있다. 카페 귀천에서 제작한 천상병 시인의 굿즈라고 한다.


말하자면, 시인의 아내 故문순옥 여사의 인사동 귀천이 1호점, 문 여사 별세 후 그 가족이 이어가는 인사동 귀천이 2호점, 그리고 천상병 시인의 저작권을 관리하며 시인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이리에 연 카페 귀천이 3호점인 셈.


카페 귀천은 구조가 독특하다. 건물 내부가 U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어, 한쪽은 주방과 굿즈 상품 소매점으로, 다른 한쪽은 천상병 시인의 서재가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로, 그 연결 공간을 일종의 갤러리로 꾸몄다. 그리고 갤러리에서 천상병 문학관이 연결되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갤러리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고즈넉한 뒤뜰이 연결되어 반려견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소매점은, 때로는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굿즈를 판매하는 아트숍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들이 덥석 잡아들기 좋은 장난감을 진열하는 잡화점이 된다. 그리고 출입문 앞에 커다란 곰 인형이 매일 다른 자세로 ‘널브러져’ 그날의 기분을 표현하는 것도 이곳의 개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빼놓을 수 없다.


인사동 귀천 찻집(그러니까 2호점)에서 공급받는 모과청으로 만드는 에이드와 차, 시인의 캐릭터를 표현하며 직접 블렌딩한 천상병 커피가 카페 귀천의 시그니처 메뉴. 최근에는 브런치 메뉴의 가짓수를 늘려 헤이리마을에서는 ‘진귀한’ 음식인 김치볶음밥도 판매하고 있다.


천상병 서재의 도서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지만,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책도 한가득 비치되어 있다. 그림책도 많이 있어서 어린이가 함께하기에도 좋다. 즉, 카페 귀천은 문학카페이자 북카페이고, 브런치카페이며, 뒤뜰은 펫카페도 된다. 그리고 그 모든 분위기를 천상병 시인의 숨결로 가지런히 감싼다. 음악 볼륨도 크지 않고, U자형 구조 덕분에 공간별 분리 효과가 있어 손님이 많을 때도 소리가 울리거나 시끄러운 느낌이 덜하다.


요즘 세상은 점점 대형 카페를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어 간다. 나도 파주에서 유명하다는 대형 카페에 가끔 들를 때가 있지만, 맛과 분위기를 떠나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오래 앉아있기 힘들다. 모름지기 ‘찻집’이란, 잔을 앞에 놓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대화하고, 때로는 딴 생각하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곳 아니던가. 카페 귀천은 그 ‘찻집’의 본질을 보여준다. 개성과 의미를 모두 갖춘 그들의 콘텐츠가 그 본질에 숨을 깊이 불어넣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