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헤이리뷰는 "헤이리의 리뷰"라는 뜻으로 매달 헤이리예술마을의 행사나 공간 등을 1~2곳씩 여행작가의 리뷰로 소개해드리는 코너입니다.

[10호]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2022.10.)

헤이리예술마을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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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2022년 10월) : 헤이리 1호 레스토랑 | 크레타


"월간 헤이리뷰는 매달 1~2곳의 헤이리 콘텐츠를 리뷰로 소개하는 웹진입니다. 여행작가의 취재 및 원고로 제작되므로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


글,사진 : 유상현 (헤이리에 사는 여행작가. <프렌즈 독일> <지금 비엔나> <루터의 길> 등 8권의 유럽여행 서적을 출간하였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헤이리예술마을에 오래 살았지만 마을 내에서 뭔가를 사먹는 일은 드물었다.

몇해 전 어느날 헤이리마을에서 일하는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다. “크레타는 가봤지?”

아니라는 나의 대답에 그분은 “간첩이냐”고 쏘아붙였다. 안 가보면 간첩이라니, 알고 보니 크레타는 그런 곳이었다.


헤이리예술마을에 약 30곳의 식당이 영업 중이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곳, 그러니까 “1호 식당”이 어디일까? 8번 게이트 바로 앞에 있는 크레타가 그 주인공이다. 마을의 시작과 함께 2003년부터 문을 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8번 게이트 부근은 마을의 외진 곳에 속했다. 가장 외진 곳에 “1호 식당”을 냈는데 결과는 대성공. 놀라운 일은 아니다. 크레타는 이미 그 전부터 몇 년의 세월 동안 파주의 다른 위치에서 “돈가스 맛집”으로 꽤 알려졌더랬다.

 

크레타는 원래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하는 김기호 작가와 사진을 찍는 김미선 작가 부부가 맥금동 작업실 한 층에 동료 예술인들과 밥 한 끼 먹으려고 만든 경양식 레스토랑이었다. 사방에 논밭이 펼쳐진 외딴 곳에 만든 예술인들의 아지트와 같았다. 인심 좋고 사람을 좋아하는 김기호 작가는 헤이리마을로 터전을 옮긴 뒤에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크레타를 경영하며 본인의 작품을 만들고, 동료의 작품을 모아 전시하고, 크고 작은 판을 벌이며 종잡을 수 없는 예술 행보를 이어왔다.

 

크레타는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같은 모습으로 내어놓는다. SNS 인증 목적으로 새로운 유행을 좇는 사람에게는 크레타를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반겨줄 친구 같은 아지트가 필요한 이들에게, 여름이든 겨울이든 언제 찾아가도 내가 아는 그 맛을 그대로 내어줄 “단골집”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크레타 이상의 선택지가 없다.

 

크레타는 메뉴 구성도 단출하다. 돈가스와 생선가스, 오븐스파게티 정도 선에서 고르면 된다. 당연히 시그니처 메뉴는 돈가스. 얇지만 넓적한 돈가스 두 덩이에 소스를 가득 부어 갖가지 사이드와 밥 한 접시를 함께 내어준다. 스프, 모닝빵, 샐러드, 후식 후르츠칵테일과 음료 등 구성은 가히 알차다.


워낙 헤이리마을 초기부터 유명했던 만큼 2000년대 초중반의 크레타 후기를 찾아보는 게 어렵지 않은데, 놀랍게도 어떤 후기를 열어보든 지금과 상차림이 똑같다. 심지어 분홍 꽃무늬 접시까지 똑같은 건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10년 전 사진과 지금 사진을 나란히 놓고 최신 것을 찾으라고 하면 누구도 정답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주스 또는 와인 한 잔이 제공되었는데 지금은 주스로 선택의 폭이 제한된다는 점 정도. 그리고 기본 메뉴만 남기고 몇 가지 요리를 메뉴판에서 지웠다는 점 정도. 그러나 10년도 더 지난 후기에 적힌 돈가스 가격과 지금 가격의 차이가 불과 2,000원이라는 점을 보면, 크레타가 같은 모습으로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 자체가 놀라운 뉴스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헤이리에 오래 살면서 크레타에 한 번도 안 가봤다는 말에 “간첩이냐?”고 되묻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음을 이제야 공감하게 된다.

 

식당의 풍경도 시대를 초월해 마치 1980~90년대의 어느 경양식 레스토랑이 들어온 것 같다. 항상 올드팝이 흐르는데 대화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데시벨로 은은히 깔린다. 낮은 소파는 푹신해서 자연스럽게 뒤로 몸이 기운다. 그리고 스프, 샐러드, 빵, 주스가 한 상 가득 차려지고, 입가심이 끝날 때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푸짐한 돈가스와 밥이 놓인다. 피클뿐만 아니라 김치까지 주는 것도 마음에 든다. 열심히 먹고 있노라면 점원이 와서 후식 음료를 고르라며 물어본다. 다 먹을 때쯤 후르츠칵테일과 음료가 도착한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정신없이 먹다 보면 어느새 배가 부르고 접시는 싹 비어있다. “간첩이냐?” 소리를 들었던 그 날 이후 수차례 크레타에 방문하였는데, 이 레퍼토리는 단 한 번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언제 가도 늘 똑같다. 그러면서 맛은 자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질리지 않아 항상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요즈음 김기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 일이 많았다. 어떤 주제의 이야기이든 그는 “어디 보자”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헤이리 “1호 식당” 개척자답게 마을의 모든 역사를 알고 있어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들려준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는 팬데믹 때문에 집필이 멈춘 필자의 사정을 몹시 딱하게 여겨 늘 관심을 가지고 근황을 물어봐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김기호 작가도 사실은 최근 몇 년간 식당 일을 챙기느라 작품을 만들 시간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A4용지에 연필로 스케치화를 남기며 어떻게든 창작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걸 보면 천상 예술인이 분명하다. 그런 모습에서 필자도 배움을 얻는다.

 

한때는 크레타에서 재기발랄한 전시회와 마켓이 종종 열렸다. 여기는 그냥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 헤이리예술마을의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프로 예술인뿐 아니라 초등학생 어린이까지도 김기호 작가에게 걸리면 반드시 뭔가를 남기게 되는 게 크레타의 마법이었다. 이러한 “과외 활동”이 최근에는 잠잠하다. 손님들이 한 번씩 들춰보곤 했던 “한뼘 도서관”도 닫혀있다. 크레타도 팬데믹을 위시하는 환경의 공세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꼭 버텨주기를, 그래서 지금까지 그러했듯 오래도록 그 모습 그대로 남아주기를, 언제 찾아가도 내가 알던 그 맛이 지금처럼 푸짐하게 차려지기를. 그리고 하나 더. 헤이리 “1호 식당”이었으니 내친김에 헤이리마을의 노포가 되어주기를. 크레타를 향한 필자의 지극히 소박한 바람이다.